네빌고다드 강의 신성한 역사와 인간의 존재 - 너는 나에게 무엇을 구하겠느냐?
오늘 밤의 주제는 "너는 나에게 무엇을 구하겠느냐?" 입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에서 시작하여 사무엘서에도 등장하고, 신약 성경에서도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내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창세기 15장에 나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길, "너에게 아들이 없으니, 내 집에서 종이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종이 너의 상속자가 될 수 없다. 네가 낳을 아들이 네 후계자가 될 것이다." 그때 해가 저물자 깊은 잠이 아브라함에게 내렸고, 그에게 큰 두려움과 어두운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너의 자손들은 그들의 땅이 아닌 곳에서 거류민이 될 것이며, 400년 동안 그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될 것이다. 그 후 그들은 큰 재산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창세기 15:12-14)
이 구절에서는 아브라함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가 깨어났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그 모든 일이 그에게 전해졌습니다. 그에게 두려움과 어두운 공포가 내렸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밤의 주제는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그 아들을 받게 되었다고 알려졌을 때, 그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백세나 되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사라는 이미 90세입니다. 그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그가 웃었다'고 나옵니다. 이 웃음은 무시하는 웃음인가요? 믿지 못하는 웃음인가요? 아니면 기쁨의 웃음일까요?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아브라함이 내일을 볼 것을 기뻐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내 날을 보고 기뻐했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56) 우리는 이 웃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웃음일 수도 있고, 기쁨의 웃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기뻐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신성한 역사를 읽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전이고, 오직 계시를 통해 알 수 있는 신비입니다. 분석하려는 사람들은 진리에 멀리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계시를 통해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 그런 경험이 없으시다면, 경험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세요. 믿거나 믿지 않거나, 이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을 믿거나 불신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왜 깊은 잠에 빠져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일어나야 하는지 전해주려고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히브리어에서 각 문자가 숫자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였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에서 19번째 문자는 '코프'(Q)입니다. 이것은 뒷머리와 관련이 있으며, 숫자적으로는 100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신비로움을 나타냅니다. 그는 "너는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아들은 네 뒷머리에서 나올 것이다"라는 약속을 받습니다.
이것은 상징적 의미입니다. 인간은 뒷머리에서 아들이 태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이와 다른 신비적인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입니다. 웃음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믿지 못하는 웃음일 수도 있고, 기쁨의 웃음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내일을 볼 것을 알고 기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존재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진정으로 속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진정한 존재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영원히 그 세계의 일부로 남습니다. 예를 들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그 세계에 속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들어와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는 죽음에까지 순종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6-8) 우리는 이것이 2000년 전에 아프리카 북부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영원히 이어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그들은 400년 동안 억압을 받을 것이며, 그 후에 그들은 큰 재산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400년은 신비적이고 중요한 숫자입니다.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는 22번째 문자입니다.
숫자 400은 상징적으로 '십자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상징하는 이 마지막 문자는 400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여기서 400년이라는 것은 우리가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대로의 400년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여정을 떠나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여행자이며,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억압당하고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큰 소유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이 소유물은 단지 하나님의 왕국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국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소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소유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고통을 겪고 나아가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우리와 동일하게 만드셨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와 같이 될 것입니다. 이 여정은 끔찍하고 두려운 여정이지만, 끝에는 위대한 존재와 위대한 소유물을 가지게 되며, 그 임재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모든 것은 본래와 끝이 동일합니다. 만약 본래가 하나님이라면, 끝도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본 대로 보면, 처음도 하나님, 끝도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뜻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가 "아브라함 전에 나는 존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이라고 하셨고, 아브라함을 보고 기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날을 보았고, 그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당신은 아직 50세도 안 됐는데 어떻게 아브라함을 보았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나를 보았다니, 아브라함 전에 나는 존재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는 단지 시간 속의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나'는 언제나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무엇을 구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다윗 내 아버지께 하신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역대하 1:9) 그 약속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약속은 "네 날이 차고 너희가 조상들과 함께 눕게 되면 내가 너의 후손을 너의 몸에서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가 내 아들이 될 것이며,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사무엘하 7:12) 이 약속이 이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인간에게서, 특히 당신의 뒤통수에서 나올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10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 아들은 자연적인 출생이 아니라, 영적인 출생입니다.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기이하고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의 법칙과는 전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전에, "혹시 다른 것을 구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그것을 이루어주겠다." (요한복음 14:14)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할 때 그 이름이 '예수'라는 이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이라는 이름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나 '여호와'라는 이름은 그저 단어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름은 '나는'입니다. "나는"이라는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건강이나 부, 명성을 그의 이름으로 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건강을 이미 가졌다고 믿고, 부유함을 이미 가졌다고 믿으며, 내가 이미 잘 알려졌다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이나 이성은 지금 당장은 그것을 부인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습니다. 제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하면 내가 그것을 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를 시험해 보십시오. 그를 시험해보고 그의 존재를 증명해 보세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까? 물론 이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다면,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그를 시험하라고 초대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I AM'입니다. 이제 모든 사람이 감히 'I AM'이라고 가정하고 그 이름으로 무엇이든 말해 보세요. 그 다음,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상을 어떻게 볼지 상상해 보세요.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세상에 객관적으로 드러나기 전에,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는 친구들의 얼굴에서 그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보는지의 표정입니다. 나는 내 친구들을 정신적으로 보고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런 다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보일지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을 의식적으로 세상에 실현시킬 수 있다면,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그를 찾은 것이며 그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실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보는 것처럼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그것을 세속적인 역사로 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신성한 역사입니다. 전체 이야기는 인간 안에서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이야기는 영혼 깊숙한 곳에서 하나님이 잠들어 계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잠들어 있었고, 하나님은 아들들을 만들어 우리를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면, 아들이 아버지여야 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이라면 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누구일까요? 내가 내 아버지와 하나라면, 아버지가 아버지라면 그 아들은 누구인가요?
그 아들은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묻혀 있으며, 그가 깨어날 때 그는 아버지가 됩니다. 그러면 내가 아버지라면 아들은 어디에 있나요? 그 아들은 바로 다윗입니다. 이제 19번째 알파벳 'Cul'은 머리 뒤쪽에 해당합니다. 그곳에서 아이가 태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두개골 뒤쪽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이론이 아니라 제 경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머리 뒤쪽에서 나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태어날 아들이 여러분이 존재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 다음 알파벳은 'R'이고, 그것의 값은 200입니다. 그것의 상징은 머리, 특히 머리의 왕관입니다. 그래서 머리의 왕관에서 이 폭발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 앞에 서게 될 불멸의 아들 다윗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며 다윗을 보고, 그가 여러분을 아버지라고 부를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50살에 불과하지만, 여러분은 다윗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있기 전에 나는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I AM'입니다. 'I AM'은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시'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시는 'I AM'을 뜻하는 동사의 어떤 형태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러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여러분은 그를 바라보며 그가 여러분의 아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50살이라고 알고 있지만, 여러분은 다윗의 아버지가 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시편 2편 7절에서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윗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세상의 제사장들이 아무리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려 해도 그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니라 이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이론으로 해석하고 잘못된 결론을 내고 있습니다.
그들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결론도 잘못된 것입니다. 사실은 다윗이며, 그를 보고 나면, 여러분은 다윗이 여러분의 아들임을 의심 없이 알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속에 묻어두신 존재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 영원을 두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행하셨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사람이 그의 여정을 마칠 때, 그가 유업을 얻을 때, 다윗은 그의 머리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의 두개골 밑에서 나오지 않고, 그의 두개골 위에서 나올 것입니다. 다윗이 그 머리에서 나올 때, 그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를 부르며, 둘은 서로를 이해하며 만날 것입니다. 그런 이해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믿으라고 말합니다. 믿으세요. 왜냐하면 '보지 않고 믿은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경험한 사람의 말을 믿었습니다. 이 복은 요한복음 20장 끝부분에서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보지 않았지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수준에서 그것을 이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 날을,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경험했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믿으세요. 여러분은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채울 수 있는 굶주림을 느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기근이 올 때까지, 그 기근을 경험한 사람의 말을 믿으세요.
"그들 중 일부는 보지 않고도 믿지 않으려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이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 날을,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경험했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야기입니다. 내가 무엇을 줄까요? 오늘 밤 여러분은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만으로 채울 수 있는 굶주림을 느낄 날이 올 것입니다. 나는 이 땅에 기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빵의 기근도 물의 목마름도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만이 그 굶주림을 채울 수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 굶주림이 여러분에게 오기 전까지는, 그 굶주림을 겪고 그것이 다윗을 아들로 경험함으로써 만족한 그 사람의 말을 믿으세요. 그 사람은 성경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가 누구의 아들입니까?' 그리고 그들이 '다윗의 아들'이라고 대답할 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이 성령 안에서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까? 그는 그를 '아돈' 즉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모든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입니다. 다윗은 그를 '나의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밤 여러분은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신다면, 무릎을 꿇고 '예수의 이름으로'라고 말해 보세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이름으로'라고 말해 보세요.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으로 요청하세요. 그의 이름은 'I AM'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I AM'이라고 감히 선언하고 그 이름으로 무엇이든 이름 지어 보세요.
예를 들어, '나는 고용되어 있다. 나는 고용된 상태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고 있다'라고 선언하세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들은 계속해서 세상에서 모든 것이 재조정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이름에 충실함으로써, 자신의 가정을 외부 세계로 드러내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여러분은 그것을 세상과 나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하면 내가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이루어 주겠습니까? 예수님이 외부에서 이루어 주시나요? 아니요, 예수님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나옵니다.
그가 내 안에 있다면,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해라.' 그럼 나는 그의 이름을 알게 됩니다. 그는 '나는 진리다'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모든 것이 진리입니까? 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하나님께 가능하고, 그의 이름은 'I AM'입니다. 나는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무엇인가요? 그것은 내 감각의 증거에 의존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내 상상의 강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내 감각의 증거가 아니라, 진리는 내 상상이 얼마나 강력하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가정하고, 그것을 가정하면서 믿음을 지킴으로써 그것을 현실로 만듭니다.
그것이 내 세상에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줄까요? 그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처럼 요청할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이제 이루어 주세요.' 그리고 그 약속은, 그의 날이 끝나고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눕게 되면, 그의 후손을 일으켜 그의 몸에서 나올 것이며, 그가 그 아버지가 되고, 그 아들은 그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이루어 주세요. 다윗을 내 안에서 나오게 하세요.
다윗이 바로 출발점이고, 끝도 다윗입니다. 그를 내 안에서 나오게 하세요. 그를 내 안에서 가져오면, 나는 'I AM'입니다. 나는 내가 말했던 바로 그 'I AM'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논의했지만,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말합니다. 믿으세요. 믿으세요. 왜냐하면 '보지 않고 믿은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복이 주어졌습니다. 이 복은 요한복음 20장 끝에 나옵니다.
그들은 보지 않았지만 믿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이 수준에서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이 날을, 나의 날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았고, 그것을 경험했으며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줄까요? 오늘 밤 여러분은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그가 나라고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만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있고,
아버지만이 아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아들이 나를 부르며, 그 아들이 내 안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나를 통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그가 나에게서 나온다면, 이 옷은 다윗이었습니다.
인류는 다윗입니다. 그래서 인류 전체가 다윗이지만, 내가 그것을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았고, 그는 나를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외적인 부나 세상의 물질적인 행운을 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행운은 사라지고 모두 시들어가며, 결국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사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지만, 그 무엇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청하면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I AM’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여러분은 굶주림을 느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그 굶주림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강연을 돌아다니거나 이곳저곳을 다녀도 아무것도 그 굶주림을 채워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경험해야만 그 굶주림이 채워집니다.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시고, 하나님이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의 존재 속에서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험만이 그 굶주림을 채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존재 속에서 여러분이 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어보세요. ‘너희 후손은 자기가 아닌 땅에서 머물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록펠러가 오늘 밤 죽는다고 해도, 그가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야 합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그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10억 달러를 남기고 갔지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었고, 그의 아버지는 수억 달러를 남겼지만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었습니다. 결국 모두가 그것을 남기고 가야만 하고,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아닌 땅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그들은 노예처럼 살게 될 것입니다.
록펠러가 수십억 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건강을 살 수 있을까요? 네, 그는 전 세계 최고의 의사들을 다 고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건강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건강을 파는 상점에서 여러 가지 물건을 팔지만, 그들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빨리 죽고 아프게 죽습니다. 결국 그들 모두는 똑같은 방식으로 죽습니다. 그들이 팔고 있는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죠.
“여러분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40살이 되었을 때, 그분의 부고를 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각자의 작은 역할을 합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에서 노예일 뿐이며, 우리는 400년 동안 억압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 세상의 육신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나무로 된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그 십자가입니다. 이 400년은 단순히 시간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나오는 데 필요한 시간만큼 지속됩니다.
신명기 28장에는 한 가지 불안한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이해하는 시간의 방식으로 시간이 측정되지 않음을 암시합니다. 우리가 이 여정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역할을 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예정한 대로 실패할 수 없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신명기 28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내십니다. 우리가 다 이끌려 나가게 될 때, 우리는 모두 평등해집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아버지이며, 모두 같은 아들을 가집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상징은 무엇일까요? 같은 아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만큼 우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내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내 아들임을 알 때, 여러분도 그 아들의 눈을 들여다보고 그가 여러분의 아들임을 안다면, 우리는 하나가 아닐까요? 하나의 아버지, 그날에는 주님이 하나가 되시고 그분의 이름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이루어진 하나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 주님이시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이란 ‘I AM’을 의미합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I AM’은 하나의 ‘I AM’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I AM’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을 이루고, 함께 모여 하나의 ‘I AM’,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아들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그 하나의 아들의 아버지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방식입니다.
이 밤에 제가 여러분께 말하는 것은 제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저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직자들, 유대교의 랍비들, 개신교 목사들, 그리고 위대한 교육자들과 함께 토론을 했습니다. 그들은 놀라움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이 상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추측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추측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어떤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일어난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신체적 탄생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나중에는 성경을 읽고 그것이 모두 예언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에드워드 토마스의 아름다운 시를 들어보세요.
‘문을 닫고 나는 새 집에 혼자 있었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집은 오래되었고, 나는 나이가 들었다. 내 귀는 예고된 두려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다. 폭풍의 밤들, 끝없는 안개 속의 낮들. 햇볕이 헛되이 비추는 슬픈 날들. 오래된 슬픔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슬픔들. 모든 것이 내게 예고되었지만, 나는 그 무엇도 예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 바람이 들리게 될지 배웠다. 그 일이 모두 이루어진 후.’
여러분은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새 집, 하나님이 이 죽음의 세상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모두 죽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영원한 구조의 일부입니다. 세상의 모든 의복은 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묻고 문을 닫고 새로운 집에 혼자 남습니다. 그때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바람과 영은 동일한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예고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그는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억압, 이집트에서의 억압을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 오직 마지막에 가서야 그는 바람이 어떻게 들리는지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이 내게 예고되었지만, 나는 그 무엇도 예견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예고된 대로 일이 일어난 후, 그 바람이 어떻게 들릴지 배웠습니다. 이 일이 일어날 때, 내가 100세가 되어 아들을 준다고 약속하신 그 일이 실현되었을 때, 제가 어떤 느낌이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저는 내 머리 뒤쪽에서 그것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저는 얼굴을 땅에 대고 웃었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는, 저는 기뻐서 그것을 보고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여정이 시작되고, 오, 얼마나 끔찍한 밤과 안개 낀 날들이었는지, 태양은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저는 그 이야기의 진실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그 바람이 어떻게 들리는지 배웠습니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바람은 사이클론처럼 집을 진동시키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바람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바람을 내가 느끼고 있는 동시에, 그 바람은 방 구석에서부터 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게 됩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아브라함이 뜨거운 한낮에 자신의 텐트 문에 앉아, 고개를 들고 세 사람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그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8장에서 말한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갑자기 세 사람이 아브라함 앞에 서고, 바람은 몹시 울기 시작합니다. 그들도 불안해합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도 웃었습니다. 그들이 웃은 이유는 그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는 말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그 사실을 발표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기지 않아 웃었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적처럼 느껴졌지만, 그가 말한 증거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그 바람이 어떻게 들리는지 배웠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믿기를 바랍니다. "보지 못했지만 믿은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경험을 한 사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경험에서 나온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진리를 다른 어떤 방식으로 알 수 있는 것보다 더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의 말을 믿음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직접 그 일을 경험하게 될 때, 그 진리를 그때에야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든, 그들이 그 경험을 했다면, 그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들은 것을 똑같이 반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에 대해 추측하며, 여러분을 설득하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전적으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저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마지막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그 일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무엇이 이루어져야 합니까? "다윗 내 아버지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그 약속은 그로부터 아들을 낳게 하고, 그 아들은 당신의 아들이 되며, 당신은 그 아들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제 그것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 당신은 두개골 뒤쪽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날 때,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됩니다. 그리고 그때 여러분은 100세가 되었지만, 몸은 50세입니다. 그 100은 ‘코프’이고, 그 상징은 두개골 뒤쪽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나와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태어나는 그 상징은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여러분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크리스마스의 정신 속에 있습니다. 내일이면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크리스마스 탄생을 축하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궁금합니다. 그들 중 몇 퍼센트가 정말로 이 이야기를 알게 될까요? 그들은 그 이야기를 배웠지만, 말씀드리건대 그들은 잘못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대적인 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장소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묻혀 있는 곳을 찾으려 하고 있지만, 그분은 그곳에 묻히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이 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바로 인간의 멋진 두개골 속에 묻히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곳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곳에서 그분이 부활할 수 있는 장소는 없습니다. 그분은 바로 여러분의 두개골에서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드라마는 그곳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문자 그대로 참된 말씀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정말로 집을 원한다면, 솔로몬의 요청을 더 원하신다면, 그것이 이 고린도후서 1장에 나옵니다. 집이든 직장이든 돈이든, 어떤 것이든 더 원하시면, 그 누구도 여러분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제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하면, 저는 그 요청을 들어줄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의 요청이 아니어도 됩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집이든, 옷이든, 유명해지는 것이든, 무엇이든 제 이름으로 요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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