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고다드 너는 어디서 왔느냐? - 성경의 시간 개념과 신의 개별화
오늘 밤의 주제는 "너는 어디서 왔느냐?"입니다. 이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랍비가 빌라도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법이 있고, 그 법에 따라 그는 죽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7절) 그들의 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에 대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나타날 때,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메시야가 나타날 때 그것은 신비롭게 이루어질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조차 그를 믿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너희들의 때는 항상 여기 있다." 그 후 그는 그것을 반복하며, "내 때는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요한복음 7:6) 그는 자신이 말하는 두 가지 완전히 다른 '때',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세계, 두 가지 다른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내 때는 아직 완전히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들의 때는 항상 여기 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에 대한 인간의 전통적인 관점은, 미래가 과거에서 계속해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의 관점은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시간은 우리 세상에서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존재했던 현상의 반복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을 그리며 계속 돌고 있고, 이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의 일부가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라고 생각되는 것은 사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은 우리의 내일일 뿐입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과거로 물러난 것이 아니며,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지금입니다.
자, 전도서에서 나온 말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우리 과학자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 책이 영감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성경의 한 부분입니다. 이 말을 들어보세요:
"이미 있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행한 것은 다시 행할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사람들이 '보라, 이것이 새롭다'고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일을 기억하는 자가 없고, 나중에 있을 일도 기억할 자가 없다." (전도서 1:9-11)
누가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의 기억이 있지만, 내 육체적 출생의 순간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영적 출생의 순간은 생생히 기억합니다. 하지만 전도서는 말합니다. 이미 있었던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며, 내가 기억할 수 없는 육체적 출생을 경험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동일하게 태어났다고 인지합니다. 그래서 그 말은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있었던 것, 즉 나의 출생은 다시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반복되는 세계 속에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카이사르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오직 신의 자비만이 나를 그 세계에서 구속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이 진정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가장 두려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절망, 그리고 영원한 죽음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신의 자비는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을 구속하며, 그것은 예수의 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예루살렘"에서)
여기에서 바퀴가 돌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지난 화요일 밤에 들었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나누고자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려준 여성은 그 자리에도 있었고, 저는 그녀가 저에게 주었던 편지를 회의 시작 직전에 받았습니다. 그때는 읽을 시간이 없었고, 저녁 회의가 끝나고 나서 밤 12시쯤에야 그 편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편지는 11월 23일에 작성된 것이었으며, 그날은 지난 토요일, 즉 세상에서 큰 일이 일어난 22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녀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11월 12일, 즉 11월 22일을 10일 앞둔 날,
매일 정해진 방식으로, 정해진 도로를 따라 사무실에서 집으로 그리고 다시 집에서 사무실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저는 특정한 교차로에 도착하면 신문 가판대에서 헤드라인을 읽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사실 거의 항상, 신호등이 빨간불이기 때문에 잠시 멈춰서 헤드라인을 읽을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향할 때, 해가 지고 있었고 땅거미가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반대 방향에서 몇 대의 차들이 오고 있었고, 저는 서쪽으로, 즉 저무는 해를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반대편에서 오는 몇몇 차량은 이미 전조등을 켜고 있었습니다.
저는 도로의 오른쪽 차선에 있었고, 신호등은 녹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상한 방식으로 습관이 저를 지배했습니다.
차가 움직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헤드라인을 읽기 위해 고개를 돌렸습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신문 가판대에 걸린 네 개의 신문이 보였습니다.
세 개는 평소처럼 검은색과 흰색이었고, 하나는 초록색 용지였습니다.
그 초록색 신문의 머리글에는 거대한 검은 글씨로 **"케네디 총격"**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날은 11월 12일이었습니다.
저는 거의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우려 했지만, 이미 교차로에 들어선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아니다. 이것은 전조등 때문이다. 해가 지고 있어서 어두워진 탓이야.
무엇보다도,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는 하루 종일 라디오가 켜져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충격적인 뉴스가 라디오에서 나오지 않을 리가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저는 계속 운전을 이어갔습니다.
교차로를 지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3초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차로를 지나자마자, 저는 이 일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 10일 후인 11월 22일 금요일, 저는 사무실에 조금 늦게 출근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두 대의 라디오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TV도 켜져 있었습니다.
모든 방송에서는 오직 하나의 뉴스만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울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분노하며 욕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용히 일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오후 3시 30분, 저는 타자기를 두드리며 계속해서 어떤 꿈을 떠올리려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와 TV에서 나오는 소식과 관련된 꿈이었지만,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꿈이 분명히 지금 들리는 소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때 한 동료가 사무실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는 신문을 한 부 들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저를 향해 걸어오며 제 이름을 부른 뒤,
제 책상 위에 신문을 내려놓으며 말했습니다.
"이 신문들 정말 빠르지 않습니까?"
그는 제가 신문을 보기를 원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신문을 집어 들고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은 초록색 표지를 하고 있었고,
딱 두 단어만이 커다란 머리글로 적혀 있었습니다.
"케네디 총격"
그 순간, 10일 전의 기억이 제 머릿속에서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다시금 11월 12일 저녁, 집으로 운전해 가던 그 순간을 생생하게 떠올렸습니다.
서쪽으로 향하며 신문 가판대에서 보았던 그 장면이 그대로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받아 들고,
아내에게 읽어주며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저는 제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샌프란시스코에서 제 강연을 후원해 주는 친구가 집에 왔습니다.
저는 그녀를 위해, 그녀와 친분이 있는 네 명의 지인들을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했습니다.
그렇게 저를 포함한 일곱 명이 모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었고,
직접 손으로 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돌려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잠시 놀라는 듯하더니,
그저 "이상한 우연"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녀가 편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3초 만에 그 기억을 잊어버렸던 것처럼,
그들 또한 이 놀라운 사실을 몇 초 만에 잊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들은 케네디 암살 사건과 관련하여
FBI, 비밀경호국, 지역 경찰이 했어야 했던 일들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성경의 전도서 1장에서 아주 분명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사
람이 저에게 신문을 건네주며 제 얼굴을 쳐다봤을 때,
저는 아마 얼굴이 창백해졌을 것입니다.
그는 저에게 **'무슨 일이에요?'**라고 물었지만,
저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에게 **'창조는 이미 끝난 상태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에게 **'이 모든 것은 이미 완성된 연극이며,
다만 우리가 실제 피를 흘리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입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저는 압니다.
제가 과거에 어떤 장면을 멈추게 하는 경험을 했을 때,
그 장면이 단순한 연극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연극에는 신성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신이 개별화되는 것"**입니다.
신은 이 연극을 통해 자신을 개별화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개별화된 신이 되는 과정의 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마침내 신이 개별화되었을 때,
그분은 한 몸 안에 통합됩니다.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도 하나이리라."
(스가랴 14장 9절)
그리고 그녀는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제로 본 것을 사실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제 이성이, 이사야서 30장에서 언급된 그 '선'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다음 그녀는 9절, 10절, 11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거짓된 아들들,
그들은 여호와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예언자들에게 '우리에게 올바른 것을 예언하지 말고, 부드러운 말을 하라, 환상을 예언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 길을 떠나라, 그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해 더 이상 듣지 않겠다'라고 합니다."
네, 저는 그녀에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아들들입니다.
당신의 이성이,
그날 밤 석양, 땅거미, 라디오에서 들려오지 않았던 뉴스,
그리고 자동차의 전조등까지 동원하여
당신이 실제로 본 것을 보지 않았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 존재 깊숙이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뉴스가 쏟아져 나올 때조차
당신은 그것을 단순한 꿈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꿈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기억을 되살리려 했지만,
당신이 실제로 경험했던 것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저에게도 매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같은 이사야서 30장에서
제 최신 저서 **『법과 약속(The Law and the Promise)』**의 제목 페이지에 사용할 구절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8절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9절, 10절, 11절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선택한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가서 그것을 그들 앞에서 돌판에 기록하고,
책에 새겨서 후일에 영원한 증거로 남기라."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을 책의 제목 페이지에 새겼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것이 달라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오늘 논의되고 있는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시간'이 저 '시간'과 다르다는 것을 모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믿지 않던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이 육
신의 몸은 우주의 영원한 구조의 일부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 육신을 떠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우주의 영원한 구조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로렌스 올리비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햄릿이라는 연극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내일, 오늘 태어나지 않은 또 다른 사람이
햄릿이라는 역할을 맡아 셰익스피어가 구상한 대로 연기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언젠가 '네빌'이라는 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을 마지막으로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육체는 계속해서 입혀지고 또 입혀질 것입니다.
영원히 반복될 것입니다.
그가 완전히 개별화될 때까지,
그리고 우리는 바다의 모래알보다 많아질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성경 속의 위대한 아브라함이며,
즉 수많은 개별 존재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개별화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이 숨 막히는 장벽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이 개별 존재들을 분리시키고,
이 기묘하고도 놀라운 '반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그
러나 그 일련의 사건들이 언제 당신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할지는
그분만이 아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여기에 존재합니다.
케네디의 머리에 박힌 총알조차도,
그것을 쏜 자조차도,
하나님의 세계의 영원한 구조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구상하셨습니다.
총을 쏜 자 역시 하나님께서 구상하신 배역을 맡은 것입니다.
그 배역은 계속해서 연기될 것이며,
무한히 반복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모든 것이 '여기'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연극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때는,
그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그의 상상력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이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총알도,
그 총을 쏜 사람도,
그로 인해 슬퍼하는 사람들도,
그가 있는 그 높은 경지에서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보는 존재의 음성을 들으라.
그의 귀는 거룩한 말씀을 들었으며,
그 말씀은 태고의 나무들 사이를 거닐었다."
그는 창세기 3장에서 말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니,
그분께서 저녁 바람이 불 때에 동산을 거니시더라."
그리고 다니엘서 4장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거룩한 자가 명령하노니,
그 나무를 찍어라!"
우리는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험'을 위해 추락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상의 세계'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상상력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렇게 깨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그 나무를 베어라!
그 가지들을 잘라라!
그 잎사귀를 벗겨라!
그 열매를 흩어라!
그러나 그 뿌리는 남겨두라!"
그리고 나무가 사람으로 바뀝니다.
"그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짐승의 마음을 주어라!
그를 짐승들과 함께 살게 하여라!
그리고 일곱 시대가 그 위를 지나게 하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동물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깨어날 때까지 이 상태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6,000년 동안 나의 죽음의 잠 속에서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안다.
오, 나의 신성한 창조자요, 구속자여!"
그렇습니다.
우리는 깨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성을 완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편지의 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실제로 본 것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의 거부가, 이사야서 30장에 나오는 그 구절이 의미하는 바와 같은 것일까요?"
그리고 그녀는 9절, 10절, 11절을 인용했습니다.
"이 거짓된 아들들, 주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 자들.
그들은 선견자들에게 '보지 말라' 하고, 예언자들에게 '우리에게 옳은 것을 예언하지 말라' 하며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환상을 예언하라' 한다.
길에서 벗어나라, 길을 떠나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에 대해 더 이상 우리에게 말하지 말라.'"
네, 저는 그녀에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 거짓된 아들들이며, 그녀의 이성(理性) 또한 그러합니다.
그날 밤, 저녁노을과 황혼, 라디오에서 들려오지 않는 뉴스, 자동차 전조등까지 모든 것이 그녀를 설득하여
그녀가 실제로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내면 깊숙이 스며들었고, 결국 사무실에서 뉴스가 터져 나올 때에도
그녀는 그것을 단순한 꿈과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깨어 있는 상태에서 꾼 꿈과 같았고, 그녀는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지만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도 매우 강렬한 방식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이사야서 30장에서 저는 최근에 출판한 책 『법과 약속』(The Law and The Promise)
제목 페이지에 인용할 구절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9절, 10절, 11절을 인용했지만, 저는 8절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가서 그들에게 그것을 판에 새기고, 책에 기록하라.
그것이 다가올 때를 위한 증거가 되어 영원히 남도록 하라."
그래서 저는 그 구절을 제목 페이지에 새겨 넣었습니다.
누군가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현재 달라스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논의되고 있는 모든 것보다도 더 진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 시간과 저 시간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을 믿지 않던 형제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이 옷들은 우주의 영원한 구조의 일부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 육신을 떠나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우주의 영원한 구조의 일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마치 햄릿이 로렌스 올리비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어도, 햄릿이라는 극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내일 태어날 어떤 사람이 이 옷을 입고 다시 햄릿을 연기할 것입니다.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햄릿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배우가 그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이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그것을 벗어날 때가 오더라도, 이 옷은 여전히 존재하며,
영원히 반복해서 입혀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신이 완전한 개별화를 이루기 전까지 계속됩니다.
그는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라 불리며, 무수한 개별 존재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자신을 개별화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특정한 사건들이 일어나
그 껍질이 깨어지고, 결국 그는 이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반복의 수레바퀴에서
해방되어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일련의 사건이 여러분 안에서 언제 시작될지는
오직 신만이 아는 비밀입니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며,
케네디의 머리에 박힌 총알조차도 신의 세계에 속한 영원한 구조의 일부입니다.
신이 그것을 계획했으며, 그것은 연극에서 연기되어야 할 하나의 역할일 뿐입니다.
그 역할은 반복되고, 또 반복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히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영원한 연극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으나,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다."
내가 정말 자유로운 세계에 있을 때,
즉,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가 아닌,
나의 상상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에 있을 때,
그때가 나의 때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나는 단순한 연기자로 존재합니다.
여전히 이 세계의 일부로 남아 있으며,
이 총알도, 그것을 쏜 자도,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는 자들도
모두 나를 방해할 수 없습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보는 자,
고대의 나무들 사이를 걸었던 거룩한 말씀을 들은 자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는 창세기 3장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바람이 서늘할 때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니엘서 4장에서도 같은 개념이 나옵니다.
거룩한 존재가 명령합니다.
"그 나무를 베어라!
그 가지를 잘라내고, 그 잎을 떨어뜨리고, 그 열매를 흩어라.
그러나 그 뿌리는 남겨 두라.
그를 하늘의 이슬로 적시게 하라."
이때, 나무는 사람이 됩니다.
"그에게서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그에게 짐승의 마음을 주어,
그가 짐승들과 함께 살게 하라."
그는
인간에서 동물로 변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동물적인 마음과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곱 번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즉, 인간이 완전히 깨어나 신성을 깨달을 때까지
그는 이 세계에서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의 신비이며,
우리가 사는 현실이 단순한 선형적인 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순환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결국 해방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힘든 시기에도 비전에 충실할 것을 요청합니다.
고난을 겪을 때에도 그 비전을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을 지나갈 때,
이것이 이미 일어났으며,
또한 반복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아십시오.
어떤 기이한 방식으로,
이 여성은 단 10일 만에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같은 블록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그것이 완전히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라디오가 요란하게 뉴스를 전하고,
텔레비전에서 사람들이 울고 저주하며 이야기할 때도,
그녀는 마치 꿈을 기억하려는 듯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오직 신문이 눈앞에 펼쳐지고,
그 페이지가 녹색이었다는 사실과
"케네디가 저격당했다"라는 헤드라인을 보았을 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녀의 기억 속으로
사진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꿈에서 보았던 신문 가판대를 떠올렸고,
세 개는 평범한 흑백 신문이었으며,
하나만 녹색 페이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그 순
간, 그녀가 교차로를 지나며
자신의 내면에서 벌였던 갈등도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은 불과 2~3초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그녀의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습니다.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전도서(Ecclesiastes)를 성경에서
삭제하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일반적인 시간의 개념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연속적으로 발전한다고 여겨집니다.
사람은 아기로 태어나 성장하고,
성인이 되고,
그다음에는 늙어 사라지는 것이
시간의 정상적인 흐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시간은
이러한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나,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개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의 책 제목 페이지에 전도서의 한 구절을 새겨 넣었습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라.
다가올 때를 위해 증거로 남겨두라."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의미입니다.
저는 단순한 법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위대한 꿈 속에서,
또 다른 꿈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의 꿈과 저의 꿈이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무수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계획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건들은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법칙을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내일이 반복될 때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습니다.
다음번에는 발을 다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팔이 삐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그것을 수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수정(revision)의 비밀" 을 알려주려고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오늘 경험한 것이 불쾌하다면,
그것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는 "시간을 되찾으라(redeem the time)" 라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불쾌하다면,
그것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오면,
우리는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여러분의 하루를 수정하십시오.
지금은 즉각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바퀴가 다시 돌 때,
그날이 오면,
이전과는 다른 현실이 펼쳐질 것입니다.
"여물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다."
달걀은 일정 시간이 지나야 부화합니다.
그러나 사건들이 순환하는 이 바퀴에서
여러분을 해방시키는 계기가 될 특정한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는
그 껍질이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를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그것을 수정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다음번에 바퀴가 돌아올 때,
같은 일을 다시 겪게 될 것입니다.
"너희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으나,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제 단 하나의 연결고리만 남아 있습니다.
그 연결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여러분은 이 반복의 세계에서 해방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에게 권한이 없다.
위에서 주어지지 않았다면,
어떤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힘이 자신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결정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두 개의 시간 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시간 과 저 세상의 시간 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개의 시간을 계속해서 구별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저 세상에서는
우리가 창조자로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이제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할지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부터
자신의 하루를 수정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음번 바퀴가 돌 때,
여러분은 더 나은 현실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녀는 정말로 집중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호가 녹색으로 바뀌자 교차로를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거의 교차로에 다다랐지만,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녀는 우측 차선에 있었고, 녹색 종이에 적힌 헤드라인을 보았습니다. "케네디, 총격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해졌습니다.
하지만 전도서 1장 9절에 이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까?
"이전 일들을 기억함이 없고, 장차 일어날 일들도 그 후에 오는 자들이 기억함이 없으리라."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잊혀진 꿈"이라고 불렀으며, 마치 꿈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애썼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꿈이었다고 생각하며 기억해 내려 했지만, 신문이 배달되어 오기 전까지는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말했습니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신문이 이렇게 빨리 배달되다니."
그때까지도 그녀는 모든 것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신문을 펼쳤고, 거기에는 같은 헤드라인이 녹색 종이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치 사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모든 것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었기에, 즉시 성경에서 자신이 찾고자 하는 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사야서 30장 9~10절의 세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들이며,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말하기를 '보지 말라' 하고, 예언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한 올바른 예언을 하지 말고, 부드럽고 기분 좋은 말만 하라. 우리에게 환상을 말하라.'"
세상은 진실을 듣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듣고 싶은 말만 듣고자 합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께 달콤한 말이나 듣기 좋은 말만 전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정(revision)"입니다.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오늘이 불쾌한 날이었다면, 그것을 수정하십시오. 그리고 내일, 아니면 다음 주, 혹은 다음 달에 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저는 여러분이 그 수정을 통해 변할 것임을 압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보았고, 한순간 그 안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멈췄습니다. 새도 하늘에서 멈춰버렸고, 떨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중력이 저 안에서 사라졌던 것입니다.
어릴 적 저는 아이작 뉴턴 경이 중력을 발견했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그가 마치 중력을 만들어 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저는 미래에 제가 얻게 될 능력의 일부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때 얻게 될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마지막 연결고리를 끊지 않은 상태에서 그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새가 날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제가 그것을 멈추었기 때문이며, 나뭇잎이 떨어지지 못하는 것도,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것도, 사람들이 걷지 못하는 것도, 식당에서 사람들이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도 모두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한 형상일 뿐, 하나의 구조물처럼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 힘을 풀어주자, 새는 다시 날기 시작했고, 나뭇잎은 다시 떨어졌으며, 풀잎은 다시 흔들렸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단순한 애니메이션과도 같다는 것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 3절)
이는 우리가 여전히 반복되는 시간의 바퀴 안에 갇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로 인해 우리는 일곱 번의 완전한 주기를 거친 후 마침내 그 바퀴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몸 안에서 구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몸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 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그때 우리는 동일한 능력을 가진 존재가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그의 몸 안에 들어갈 때, 우리는 예수가 됩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이것이 진리입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가 그것을 읽고 말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쓴 것이기 때문에 나는 모든 단어를 믿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 속에서 돌아가는 바퀴들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환생(reincarnation)을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삶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예를 들어, 맹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요한복음 9장 3절)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수정(revision)"을 통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repentance)입니다. 회개란 단순한 후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진정한 혁명은 정치적 혁명이 아닙니다. 쿠바에서든, 러시아에서든, 미국에서든,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나는 혁명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혁명은 한 개인이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외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며,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현실을 바꾸는 방법입니다.
이제 침묵 속으로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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